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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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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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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 무늬 길이다.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이다.
                                    아프리카로 초원으로 뻗어가고 싶은 길이다.
                                         -김왕노 디카시 <길의 꿈>


김왕노 시인의 제2회 디카시작품상 수상작이다. 디카시는 극순간 예술로 영상과 짧은 언술로 구성된다. "길이다"라는 말이 세 번 반복한다. 꼭 같은 반복이라도 어떤 경우는 시를 살해하고 또 어떤 경우는 시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물론 이 경우는 줄글로 이어진 것 같은 언술에 리듬을 부여하여 살아 움직이는 효과를 부여한다.

1행에도 '기린'이라는 단어가 또 반복된다. 1행이 "기린 무늬 길이다"와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이다" 이 두 문장이 하나의 행으로 배열했는데도 시적 탄력이 느껴지는 것은 반복의 묘미 때문이다. 또 1행과 2행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도 "싶은 길이다"가 반복되면서 드러나는 효과다. 이 디카시에서의 반복은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게 아니다. 디카시의 문자도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는 시는 아니지만 시적 탄력을 지니는 언술이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기린 무늬 길'을 만난다. 사실 기린 무늬 길이라고 호명하기 전에는 길게 그어진 골목길일 뿐이었다. 그것에서 기린 무늬를 읽어내고 거기서 또 실제 기린이라는 존재를 호명하여 아프리카 초원으로 달려가는 꿈을 부여한다. 의미 없는 골목길에서 기린을 호명하여 아프리카 초원로 달리게 하는 마술적 상상력은 시인의 것인가. 아니면 사물의 것인가. 이건 아마 우문일 것이다. 이미 길과 기린과 시인은 한 몸이 되어버린 것인데, 어느 하나의 것이라고 떼어서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의미 없는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디카로 포획하여 언술함으로써 제3의 새로운 생명체로 빚어내는 것이 디카시의 비전임을 알 수 있다. 이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이뤄진다. 순간적으로 번개처럼 일어나는 시적 영감에 기인한다. 디카시는 대부분 접신 상태에서 씌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디카시에서의 시인은 크레이티브(Creative)이기보다는 에이전트(agent)라는 말이 좀더 어울린다. 디카시에서 시인은 자연이나 신의 대리인이다. 무릇 모든 시인은 창작자이기도 하지만 뮤즈나 시마의 대리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디카시에서 시인을 에이전트적 속성이 더 강하다고 하는 것은 디카시에서 시인은 영감을 일순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순간 받아쓰듯 언술하는 극순간 예술의 속성 때문이다.

디카시에서 시인은 영감을 일순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순간 받아쓰듯 언술

시인은 골목길을 걸어가다 바로 그 길에서 문득 시적 감흥을 느껴 스마트폰 디카를 들이대어 기린 무늬 골목길을 찍고 한 마리 기린을 불러내어 아프리카 초원으로 달려가는 꿈을 노래한 것이다.

이게 어찌 기린 무늬 길의 꿈으로 한정되는 것인가. 시인의 꿈이고 나의 꿈이고 너의 꿈이고 우리 모두의 꿈이 아닌가. 이렇게 봐도 디카시에서 시인은 역시 에이전트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를 한 덩어리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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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