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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다니는 단골 한의원이 있다. 1998년부터 다니다가, 이제는 감기만 걸려도 찾는다. 특히 2015년 2월 뇌졸중으로 두 번 쓰러진 이후로는 매주 정기적으로 다닌다.

재작년 어느 날 눈을 떴는데, 흰 커튼이 쳐져 있고 침대 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간 '아이씨 뇌졸중으로 또 쓰러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곳은 병원 응급실이 아니라 한의원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건강할 때 책이나 실컷 읽어야지'라는 평소 생각을 다시 한 번 굳혔다.

연평균 100권 정도를 30년 동안 읽어왔는데, 특히 2015년 이후로는 죽기 살기로 독서에 매달려왔다. 그래서 2015년 3월부터 2018년 11월말 현재까지 1000권을 읽었다. 45개월 동안 읽은 책 중에서 감명 깊었던 다섯 가지 분야의 책을 정리해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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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서재에 장식용 책으로 꽂혀 있다가 끄집어 낸 책이 있다.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체된 지 60년 만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 만든 <친일인명사전>이다. "사전은 필요한 부분만 읽는 거지" 할 수도 있지만 ㄱ부터 ㅎ까지 전부 읽었다. 189명의 편찬 및 집필위원이 집단 창작한 이 책을 소장용으로 방치한다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아 무식하게 읽었다.

이 책이 처음 나왔던 1994년에 "꼭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은 했지만 선뜻 실천하지는 못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제주 4.3은 역사의 잊혀진 존재였고, 4.3을 말하면 빨갱이로 취급받았다. 1987년 이후 4.3문제는 물밑에서 지상으로 드러났다. '제주 4.3연구소'가 출범해, 피해조사와 증언채록, 유적지 발굴을 했다.
 
4.3은 말한다 <제민일보>가 펴낸 <4.3은 말한다>
▲ 4.3은 말한다 <제민일보>가 펴낸 <4.3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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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제민일보>가 사고를 쳤다. 제민일보는 4.3취재반을 구성해 위 사건에 대한 체계적인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다. 취재반은 제주도 전역을 다니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났고 군·경 관련 자료를 수집했으며, 미국에까지 가 전문가의 자문을 받고 자료를 입수했다. 약 3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4.3 사건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든 이 책은 전예원 출판사에서 만든 <4.3은 말한다 1~5>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전태일에 빚을 졌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광주에 빚졌다. 전두환 군사쿠데타 세력에 저항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올곧게 지키기 위한 광주시민들의 투쟁이 광주민주화운동이다. 다른 말로 '광주민중항쟁' 이라고도 한다.

광주민중항쟁은 오랜 기간 '광주사태'로 폄하됐으며, 광주·전남 이외의 시민들에게 지역차별의 준거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기야 2018년 현재까지도 북한 특수부대의 개입에 의한 '폭동' 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진실은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 진실을 향한 외침 중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구성원들의 고군분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들은 항쟁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90년에 500명을 인터뷰해 원고지 2만 5000매 분량의 구술 증언자료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광주항쟁의 배경과 원인, 진행과정, 항쟁 이후의 상처 등에 대해 소상하게 정리했다.
 
광주항쟁사료집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가 펴낸 <5월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 광주항쟁사료집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가 펴낸 <5월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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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빛출판사에서 펴낸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은 역사에 길이 빛날 보석같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 첫 번째로 읽은 책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민음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
▲ 세계문학전집 민음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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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여러 가지 꿈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소설가' 였다. 되도 않는 황당한 꿈이지만, 어릴 때 무슨 꿈인들 못 꾸랴. 30년 동안 심취했던 나의 독서 영역은 주로 역사, 경제, 문학이었다. 그런데 문학은 국내문학에 한정되었고, 특히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대하소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예전부터 가졌던 아쉬움, '다양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세계문학과 신화에 대한 무지'를 해소해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책 몇권 읽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시도하기로 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다.

2018년 11월말 현재까지 358권이 출판된 이 책은 동·서양의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의 명작을 다루고 있다. 2017년부터 읽기 시작해 현재 190권을 읽었다.
이 추세대로라면 2020년 상반기에는 전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책이 생소한 문화로 인해 독서 속도를 발목 잡지만 나름대로의 재미가 쏠쏠하다.

충격의 연속, <제2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 타임라이프에서 펴낸 <제2차세계대전>
▲ 제2차세계대전 타임라이프에서 펴낸 <제2차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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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에 문화인류학자 박현수 교수가 한 말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에 활동한 빨치산 사진이 있다면 당시의 생활과 풍습을 엿볼 수 있을 텐데"라는 말이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이들은 헛웃음을 쳤다. 그런 사진이 있을 리 만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한 빨치산(파르티잔)의 사진이 남아 있었다. 빨치산의 사진뿐만 아니라 전투상황, 군중집회, 정치적 사건 등에 관한 엄청난 사진이 실린 책이다.

1982년에 '타임라이프'사가 펴낸 <제2차세계대전 1~30> 이다. 이 책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박건웅이 그린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박건웅이 그린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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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5일 충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이 충주경찰서에서 호암동 싸리재로 끌려갔다. 이들은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학살 이후 50년 동안 희생자와 유가족은 빨갱이로 몰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시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2005년 과거사법 제정 이후 보도연맹사건은 국가에 의해 진실규명 되었고, 충주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많은 시민들이 여전히 보도연맹사건이 무엇인지 모른다. 결국 역사와 소통하는 것은 국가기관의 결정문 한 장이 아니라, 지속적인 증언과 기록을 통해 기억하는 문제인 것이다.

전쟁 당시 할아버지가 이 사건으로 학살된 최용탁 작가가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물푸레나무 입장에서 쓴 충주 보도연맹원사건 소설이다. 상상이 가미된 이 소설은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하며, 인권의 문제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이 소설 원작을 토대로 박건웅이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이라는 만화책을 펴냈다. 원작만큼의 감동이 밀려오고, 읽으면서 살이 떨리는 책이다. 청주 모 방송국의 피디가 이 책을 밤새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해봄 박건웅 만화집 <그해 봄>
▲ 그해봄 박건웅 만화집 <그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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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웅은 이 책 이외에도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사건과 인물을 만화로 그렸다. <짐승의 시간>, <노근리 이야기 상·하>, <꽃 1~4>, <제시이야기>, <그해 봄>, <나는 공산주의자다> 등이다. 그의 만화 한 권을 보면 역사책 10권을 읽는 기분이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 <백사람의 십년>
 
백사람의 십년 문화대혁명기 중국민중의 고통을 그린 <백 사람의 십년>
▲ 백사람의 십년 문화대혁명기 중국민중의 고통을 그린 <백 사람의 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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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에는 '양심의 자유'가 없는 곳이었다. 즉 학문·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보니 세계의 다양한 사상조류가 여과 없이 국내에 수입되었고, 지식인들과 청년학생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어차피 '절대 진리란 없는 것' 이지만 당시 사상의 불구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사상이 이상향 그 자체였다. 중국에서 시행된 1958년의 '대약진운동'과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시행된 '문화대혁명' 역시 한때 그런 역할을 했다. '하방'이라는 이름아래 민중생활을 직접 경험하게 한 조치 역시 그 당시에 이루어진 조치이다.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노력과 혁명적 실천으로 생산력을 급격히 증대하겠다는 '대약진운동'과 전통적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해 중국식 사회주의를 실천하려 했던 '문화대혁명'은 엄청난 피해자를 양산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수천 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애초취지의 순수성을 십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겪은 중국민중들의 고통을 어찌 외면할 수가 있을까?
 
인민3부작 중국의 해방부터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인민 3부작>
▲ 인민3부작 중국의 해방부터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인민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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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전면으로 응시한 책이 펑지차이가 지은 <백사람의 십년>이다. 또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사건을 다룬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대혁명>이 있다. 인류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문제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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