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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힘들었다.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에서 활동해야 했다. 그런데 경성이라 불린 일제 치하 서울에서 아주 대놓고 독립운동을 벌인 인물이 있다.

아주 독특한 독립운동이었다. 서울에서 일본인들의 주거 공간을 축소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인들만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대거 건축하는 독립운동이었다. 서울특별시가 국사편찬위원회·종로구·한국부동산개발협회·대한건설협회서울지부와 공동 추진하는 기념사업의 주인공, 기농 정세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때 건축왕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건축으로 일본인의 확장을 견제한 정세권

 정세권의 모습. 김경민 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의 한 페이지를 찍은 사진.
 정세권의 모습. 김경민 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의 한 페이지를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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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는 1923년부터 주택건축을 시작해 1930년대 후반에는 2500채를 지을 정도로 사업 규모를 키웠다. 정세권도 같은 시기에 건축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트럼프 아버지와 달리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단순히 기업을 늘리는 차원이 아니라, 항일운동 관점에서 사업을 전개한 것이다. 정세권은 일본인들의 거주지 확장을 견제했다. 일제강점기 초반, 한·일 두 민족의 서울 거주 실태에 관해 서울특별시사(史)편찬위원회의 <서울역사 2000년>은 이렇게 말한다.

"서울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경계로 하여 남쪽에는 일본인 거류지, 북쪽에는 한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청계천을 건너 이북으로 북진했다. 총독부도 전략적으로 지원했다. 1925년 6월 18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일제는 도시 미관을 명분으로 종로 일대에 도로를 내면서 조선인 주택을 허문 뒤 값비싼 2층 이상의 주택만 짓도록 했다. 경제력이 약한 조선인들을 내쫓고 일본인들이 일본식 주택을 짓도록 지원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권은 청계천 이북 한옥들을 매입하고 그 부지에 조선인들의 집을 지었다. 일본인들이 진출하는 북촌 지역에다, 그들이 입주하기 곤란한 조선식 주택을 지음으로써 일본식 주택 공간의 확장을 견제한 것이다. 이렇게 생긴 것 중 하나가 서울 북촌 한옥 단지다. 

1930년대에는 일본인들이 왕십리 쪽으로 진출했다. 이에 맞춰 정세권은 그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일본인들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을 교묘히 견제하는 정세권식 독립운동이었다. 

정세권의 사업에서는 신개념이 많이 나타났다. 대규모 전통 한옥을 쪼개 소규모 개량 한옥을 많이 만들었다. 덕분에 보다 많은 조선인 가정이 북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ㅁ자 모양의 개량한옥 내부에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만들었다. 그는 주택 사업을 북촌은 물론이고 서울 외곽으로도 확장했다. 이렇게 그는 자기 나름의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거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다.

사업 여건 안 좋았지만,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투자

 왼쪽은 전통 한옥, 오른쪽은 북촌한옥마을의 개량한옥. 왼쪽 사진은 서울 남산한옥마을에서 찍었고, 오른쪽 사진은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찍었다.
 왼쪽은 전통 한옥, 오른쪽은 북촌한옥마을의 개량한옥. 왼쪽 사진은 서울 남산한옥마을에서 찍었고, 오른쪽 사진은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찍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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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지역. 점선은 한양 도성이고, 갈색은 정세권이 개발한 지역.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의 한 페이지.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지역. 점선은 한양 도성이고, 갈색은 정세권이 개발한 지역.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의 한 페이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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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업적 목적이 밑바당이 됐겠지만, 정세권의 행동에는 민족 사랑이 담겨 있었다. 도시계획학 학자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에 따르면, 정세권의 둘째 딸인 고 정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일본인들이 발붙일 곳을 줄이고자 주택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사업계획을 짜고 건축현장을 돌아보고 장부를 들여다보는 그의 머릿속에 '민족'이란 두 글자가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딸에게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점은 삶의 궤적에서도 드러난다.

정세권은 1888년 경상도 고성군 하이면에서 출생했다. 농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 집안이 일어섰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영특했던 그는 진주사범학교를 나온 뒤 20대 초반부터 면장 생활을 했다. 20세 때인 1908년부터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22세 때인 1910년부터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12년에 면장을 그만둔 그는 1919년 서울로 이주했다. 그때 수중에 2만 원이 있었다. 20칸짜리 한옥 두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기둥 2개 사이의 공간을 1칸이라고 한다. 기둥이 3개면 2칸이다. 2만 원을 종잣돈으로 1920년에 건양사란 건축회사를 차린 그는 10년도 안 돼 대표적인 부동산 재벌이 되었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일본인들의 '북진'에 맞서 한옥마을을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불순'한 사업가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운동에 돈도 많이 썼다. 사업에서 번 돈으로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기증했다. 조선어학회가 1935년 발간한 <한글> 제3권 제6호에 실린 '조선어학회의 발전'이란 글에서 한글학자 이극로는 이렇게 말했다.

"정세권 씨로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2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감사히 제공받게 되었다. ··· 우리 조선어학회는 조선 사회에 대하여, 특별히 정세권 씨에 대하여 감사함을 마지 아니하는 동시에 ···."

돈 쓰는 걸 보면, 그 사람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반인보다 돈이 더욱 절실한 사업가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정세권은 힘들게 번 돈을 위험한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가 무엇을 중시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인 건축 청부업자가 많았다. 이들이 총독부의 지원 하에 조선에서의 건축사업을 주도했다. 2006년에 <대한건축학회 논문집>에 실린 이금도·서치상의 '조선총독부 발주공사의 입찰방식과 일본 청부업자의 수주독점 형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래의 '같은 기간'이란 표현은 1922년부터 1932년까지를 지칭한다.

"일본 건설청부업자 47개 사가 같은 기간 동안 청부한 금액은 당시 조선에서의 총공사청부액의 약 60%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같은 기간'은 정세권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정세권을 포함한 조선인 업자들의 사업 여건이 극도로 안 좋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일본 업자들과 경쟁하며 힘겹게 벌어들인 돈을 정세권은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바쳤다. 그가 돈과 민족 중 무엇을 더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조선의 집터를 지킨 건축가, 자신의 집을 빼앗기다

 조선어학회 터. 사진 우측 하단에 표지석이 있다. 서울시 종로구 화동에서 찍은 사진.
 조선어학회 터. 사진 우측 하단에 표지석이 있다. 서울시 종로구 화동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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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았으니 총독부에 밉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세권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가 겪은 고초에 관해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는 이렇게 말한다.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11월 흥원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43년 6월 다시 경제범으로 몰려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재산을 강압적으로 탈취당한 것이다."

정세권은 뚝섬 일대의 대규모 토지를 빼앗겼다. 이로 인해 사업이 크게 기울고 말았다. 위 책에 따르면, 그때 상황을 둘째 딸 정정식은 이렇게 회고했다.

"왜정 말기, 뚝섬 일대의 큰 토지를 빼앗긴 후 가세가 기울었어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큰 집을 나와서 다른 곳으로 이사가 가야 했을 때, 옆집 사람들이 처량한 듯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세권은 일제한테 빼앗긴 땅 위에 조선인의 집을 세웠다. 땅은 빼앗겼지만, 집터는 지킨 것이다. 남의 나라 땅은 쉽게 빼앗을 수 있어도, 남의 나라 백성들의 집은 쉽게 빼앗지 못한다. 땅은 군사력으로 빼앗을 수 있지만, 집은 법률과 절차에 따라 빼앗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점을 '악용'해 정세권은 개량한옥 사업으로 조선의 집터를 지켰다. 일본인들이 볼 때는 정말로 '나쁜 사람', '나쁜 사업가'였다.

정세권은 건축으로 독립운동을 벌인 '애국 사장'이다. 그의 공로를 뒤늦게나마 인정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시 등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올랐을 절절한 민족사랑이, 얼어붙은 한국의 겨울을 녹여나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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