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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된 그림이다. 두 개의 세계는 지리적으로, 사교적으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 말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 <우리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발췌한 것으로, 그는 이 말을 통해 부유한 계층과 가난한 계층이 서로에게 점점 더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세계적인 석학인 그의 말에 감히 덧붙이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두 개보단 훨씬 더 많은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의 사람들은 서로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사회 구조적으로 각 집단들이 서로 교류할 기회가 적어졌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다른 세계에게 이질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스스로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자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우리는 자신이 속한 세계보다 더 가난하고 소외된 세계로부터 멀어지고자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19대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지난 7일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복합문화 공간 에무(이하 에무)에서 열린 문화제 <국가란 무엇인가>(5.4~5.28)는 나로 하여금 이러한  욕구와 마주하도록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욕구가 내가 세상과 마주하는 태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질적 존재가 되고자하는 야릇한 욕망과 마주하다

영화<왕초와 용가리> "네가 생각하기에 없이 사는 사람들 참 무식하지. 말 끝마다 욕이고. 어쩌겠냐 세상이 이렇게 만들었는데" 카메라 렌즈 뒤, 스크린 너머에 앉아있던 나에게 하는 것 같았던 말. 이 한 마디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던 건 왜 일까?
▲ 영화<왕초와 용가리> "네가 생각하기에 없이 사는 사람들 참 무식하지. 말 끝마다 욕이고. 어쩌겠냐 세상이 이렇게 만들었는데" 카메라 렌즈 뒤, 스크린 너머에 앉아있던 나에게 하는 것 같았던 말. 이 한 마디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던 건 왜 일까?
ⓒ 봄저너머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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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무에서 하루 동안 영화 두 편과 사진 전시회 하나를 관람했다. 그 중 영화<왕초와 용가리>와 사진전 <난곡이야기>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었다. 둘은 비슷한 대상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해 보이지만, 상반된 표현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난곡이야기>의 작가 김영종이 전시 서문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주관성은 객관적 사태(달동네)에서 발생적 원인을 자의적으로 구성하여 참을 표현하려는 데 있다"라고 말했듯, 그의 사진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적 상황을 찍은 것이다.

반면 영화 <왕초와 용가리>는 카메라를 이용해 판자촌 '안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의 허구도 없이 있는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표현 방식이 관객이 가지고 있는 스크린 너머의 세계와 이질적이고자 하는 욕구를 어떻게 이용하는가 이다.

사진전 <난곡이야기> <난곡이야기>에서 작가가 자의적으로 구성한, 사태의 발생적 원인은 '개발 신화'이며 신화와 축출의 '재통합'이며 '가난의 공'다. 객관적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흔히 보이는 폐허미나 향수는 원인을 은폐하려는, 이것들의 유혹이라고 작가는 말했다.(전시 서문 중)
▲ 사진전 <난곡이야기> <난곡이야기>에서 작가가 자의적으로 구성한, 사태의 발생적 원인은 '개발 신화'이며 신화와 축출의 '재통합'이며 '가난의 공'다. 객관적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흔히 보이는 폐허미나 향수는 원인을 은폐하려는, 이것들의 유혹이라고 작가는 말했다.(전시 서문 중)
ⓒ 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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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 <난곡이야기> <난곡이야기>에서 작가가 자의적으로 구성한, 사태의 발생적 원인은 '개발 신화'이며 신화와 축출의 '재통합'이며 '가난의 공'다. 객관적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흔히 보이는 폐허미나 향수는 원인을 은폐하려는, 이것들의 유혹이라고 작가는 말했다.(전시 서문 중)
▲ 사진전 <난곡이야기> <난곡이야기>에서 작가가 자의적으로 구성한, 사태의 발생적 원인은 '개발 신화'이며 신화와 축출의 '재통합'이며 '가난의 공'다. 객관적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흔히 보이는 폐허미나 향수는 원인을 은폐하려는, 이것들의 유혹이라고 작가는 말했다.(전시 서문 중)
ⓒ 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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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이야기>는 서울 관악구의 달동네 난곡이 철거되기 직전의 모습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그곳을 배경으로 작가는 마을 공터에 나란히 서있는 할머니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과 같은 설정 사진을 찍었다. 사진 안에 담긴 상황들은 허구이지만,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즉 개발의 이익 앞에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됐을 그들의 삶이 난곡마을에 있었다는 참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 앞에 그들로부터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개입되지 못한다. 달동네인 난곡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명백히 가난하지만, 사진 속 그들의 모습은 어떤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왕초와 용가리>는 내 삶의 모습과는 다른 '안동네'사람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이질적 존재가 되고자하는 나의 욕구와 마주하게 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안동네의 친절한 봉사자가 된 상상을 했다. 이는 얼핏 보면 선행에 대한 관심 같지만, 그 뒤에는 그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부도덕한 욕망이 숨어있다.

<왕초와 용가리>는 이러한 욕망을 끄집어내고 관객이 그러한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똑같은 상황을 다른 태도 즉 이질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경계하면서 바라보도록 한다.

우리가 함께 해야하는 이유

 영화 속 카메라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후 "당신들의 이야기를 해보세요"라고 말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영화. 투쟁의 역사란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은 영화. <위로공단>은 바로 그런 영화이다.
 영화 속 카메라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후 "당신들의 이야기를 해보세요"라고 말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영화. 투쟁의 역사란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은 영화. <위로공단>은 바로 그런 영화이다.
ⓒ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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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방식에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영화<왕초와 용가리>와 사진전<난곡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특별하게 생각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반면 그 날 본 또 다른 영화<위로공단>은 투쟁으로 시작해 투쟁으로 끝나는 영화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1985년 구로 동맹파업으로 시작해 2014년 캄보디아 의류공장 유혈사태로 이어지는데, 과거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일했던 구로공단 여공들의 투쟁이야기는 20여년이 지난 2014년 한국기업이 운영하는 캄보디아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재연된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최저임금 지급이었고, 돌아온 것은 협상의 장이 아닌 무장경찰의 총격진압이었다.

이 영화를 볼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공감능력이다. 즉 그들의 문제를 나와 상관없는 문제로 규정하고 싶어 하는 욕구, 다르게 말하면 이질적 존재가 되고자하는 욕구를 얼마나 잘 떨쳐내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욕구를 떨쳐내도 그들의 절실한 투쟁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는데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슬로건은 '이것은 모두의 문제이다' 내지는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다'이다.

하지만 최저임금을 받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을 내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나도 나이키가 신고 싶다'를 구호로 내건 85년도 구로공단 여공들의 절실함은 이미 나이키를 신고 있는 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감하기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이 그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함께한다. 나는 이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나의 삶과 내가 속한 집단을 변화시키는데도 다른 누군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변화

에무에서 열린 문화제 <국가란 무엇인가>에서의 체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국가에 대한 완벽한 정의가 아니라 우리 태도의 변화이다. 앞서 말했듯 세계는 여러 개의 그림으로 나누어져 있다. 생산직 노동자의 세계, 사무직 노동자의 세계 그리고 자본가의 세계. 또 다시 판자촌에 사는 사람의 세계, 고급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세계. 각각의 그림들은 다른 그림과 겹쳐지기도 하고 완전히 따로 존재하기도 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이번 문화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작은 세계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과,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 세계가 직면한 문제점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점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낯선 것에 대한 경험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 점검. 이 두 가지는 사회를 마주하는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내가 이러한 과정을 경험했듯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에무에서 열리는 문화제 <국가란 무엇인가>의 일정표를 첨부한다. 영화, 공연, 사진전과 함께 5월 25일에는 <이미지의 공모와 기억, 그리고 재현과 표현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움을 열기도 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일정표
 <국가란 무엇인가> 일정표
ⓒ 복합문화 공간 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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