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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한 점 바라보는 일이 좋은 책 한 권 읽는 일과 같다면 무어라 할까?

분명한 것은 '청화백자 홍치명 송죽문호(靑華白瓷弘治銘松竹文壺/국보 176호)' 한 점에서 끝없이 이어온 자연으로부터의 영감을 사유한다면 부족함 없는 좋은 책 한 권 읽은 것과 진배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는 이와 같이 좋은 작품들을 만나면 도자기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노래 한 곡이나 그림 한 점, 시 한 수에서도 같다.

생활도자기 현대 생활전반에 거쳐 폭넓게 이용되는 도자기는 식생활은 물론이고 집안의 장식용으로나 들꽃이나 허브 등을 가꾸는 취미활동에도 이용된다.
▲ 생활도자기 현대 생활전반에 거쳐 폭넓게 이용되는 도자기는 식생활은 물론이고 집안의 장식용으로나 들꽃이나 허브 등을 가꾸는 취미활동에도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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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양양읍으로 향하여 가는 길목에 있는 오색마을에서 지난 3월부터 어르신들을 위한 도자기교실이 운영되었다. 마침 임승엽 이장의 부인 장의숙씨가 오랫동안 도예가로 활동을 해왔던 터라 외부에서 별도로 강사를 초빙할 필요가 없어 자연스럽게 추진된 것이다.

처음부터 좋은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빚은 도자기가 가마에서 구워진 다음 굽갈이 과정을 마치고 전시를 하였을 때 어르신들의 감동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현대 생활에서 도자기는 보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식생활과 차(茶道)문화는 물론이고, 집안의 장식용으로도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공산품도 널리 이용되지만 자신이 직접 도예를 배워 생활전반에 이용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한 도자 역사는 1만년에 이르는데, 우리의 도자기 역사는 신석기시대 농경생활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인들이 곡물을 담기 위한 용도로 제작한 토기를 그 시초로 본다.

도자기교실 양양군 서면 오색1리 오색마을 노인회의 학습활동에 도자기교실을 진행하여 이곳에서 어르신들이 제작한 도자기를 전시했다.
▲ 도자기교실 양양군 서면 오색1리 오색마을 노인회의 학습활동에 도자기교실을 진행하여 이곳에서 어르신들이 제작한 도자기를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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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토기들이 발견되건만 우리의 상고사는 여전히 역사가 아닌 신화로만 인정받는 입장이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한문(漢文)이 고대 우리민족의 문자라는 걸 중국의 학자들도 인정하는데 우리는 한글만 우리의 문자로 생각할 정도로 당당하게 나설 줄 모르니 이 또한 안타까운 노릇이다.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다음 구워내는 방법에 따라 토기부터 도기와 자기까지로 나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토기와 도기가 동시에 사용되었고, 일부에서는 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토기와 도기를 원하여 이에 따라 보다 숙련된 장인들의 솜씨로 제작한 사치품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영토는 신라와 발해가 각각 남쪽과 북쪽에 넓게 자리하며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통일신라라고 하지만 전 영토를 모두 지배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일부분을 정복했을 뿐, 옛 고구려의 영토엔 발해가 세력을 확장하여 고구려까지 흡수해 말 그대로 남북국시대였다. 이때 발해는 지금의 중국과 몽골, 러시아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이었고, 신라는 백제의 영토와 고구려의 영토 일부만 차지했을 뿐이다.

이때 신라에서는 화장 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뼛가루를 담는 용기들도 많이 제작되었고, 심지어 중국에서 들여온 당삼채 항아리를 사용하는 명품족까지 있었다 하니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망은 사후세계까지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발해의 '삼채 향로'와 신라의 '삼채합'은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도자 기법의 숙련된 솜씨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도자기는 통일신라 이후 고려왕조에 들어와서부터다. 이 시기의 도자기는 토기에서 이미 나타난 조형적 아름다움과 통일신라의 화려함까지 모두 아우르는 조형미와 함께 다채로운 상감기법까지 고루 이용되었다. 생활자기로만 볼 수 없는 대단히 화려한 청자가 제작된 것이다.

이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전통적인 도자기술을 토대로 중국 송나라의 자기기술을 흡수하여 독자적인 비취색의 유약을 활용한 또 다른 하나의 도자기법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때 송나라에서도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의 명품으로 인정하여 구하려 애썼을 정도라 한다.

경기도의 문공유 묘에서 발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감기법이 고려 의종 13년(1159)에 세상을 떠난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청자상감보상당초무늬 다완(국보 115호)'을 이전의 순청자와 상감청자간의 연대기준으로 잡는다.

일반적으로 청자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하지만 순청자란 말은 또 무어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순청자는 조각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된 말 그대로 유약만 입혀 구워낸 순수한 비색의 청자를 이른다. '청자 구룡형 주전자(국보 96호)'나 '청자 투각 칠보무늬 뚜껑 향로(국보 95호)'와 같은 청자들은 모두 순청자에 속한다.

순청자는 형태적으로나 비색에서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 되었으나 도공들은 보다 더 아름다운 청자를 욕심내었던 듯하다.

12세기 중반이 넘어가면서 말린 그릇의 표면에 무늬를 파고, 다른 색을 낼 수 있는 흙을 파낸 무늬에 채운 뒤 다시 한 번 또 다른 무늬를 파고 이번엔 다른 색을 낼 수 있는 흙을 그곳에 채워 초벌구이를 한 뒤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를 해 상감청자를 완성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상감기법의 청자로는 '청자상감 운학무늬매병 (국보 68호)'를 꼽을 수 있다.

생활자기 양양군 오색마을의 어르신들이 도자기교실에서 배우며 제작한 도자기를 전시했다.
▲ 생활자기 양양군 오색마을의 어르신들이 도자기교실에서 배우며 제작한 도자기를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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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이곳 양양군 서면 오색1리 백암마을에도 가마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겼을 때가 1392년이다. 이때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분청사기가 나타난다. 이조백자하면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연상하는 순백의 '달항아리'는 전반기 조선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기 전 나타난 초기의 분청사기는 상감기법과 함께 백토를 발라 나무칼로 무늬를 세기는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풀로 엮은 비(솔)로 빚은 그릇을 돌려가며 백토물을 발라 풀비의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게 작업하는 귀얄무늬가 나타나며, 백토물에 그릇을 텀벙 담갔다 건져내는 말 그대로 '덤벙분청'도 함께 나타난다.

물론 이때 이미 분청사기와 백자가 전국에 산재한 가마에서 제작되어 왔다. 그러나 15세기말 경기도 광주에 왕실에서 필요한 도자기만을 전담하여 생산하는 '관요'가 생기면서 지방의 가마에서 제작되는 분청사기나 백자들은 점차 그 수요가 줄다보니 서서히 생산량과 함께 작품성도 낮아지게 된 모양이다.

이후 많은 이들이 감명 깊게 읽은 우리 국보에 대한 지침서와 같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혜곡 최순우 전 중앙 국립박물관장이 "며느리 엉덩이 같다"고 표현한 백자에서 가장 백미라 할 수 있는 '달 항아리'가 17세기에 제작된다. 앳되고 귀여운 며느리가 무언가를 하려 고개를 숙이고 뒷모습을 보인 정경을 그리 표현했으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이 국보로 지정된 '백자 달 항아리'는 위의 사옹원의 지방분원인 광주 분원에서 제작되었으리란 판단도 아주 그릇되다 할 수 없는 조건이었던 바탕도, 지방의 가마들이 왕실에 진상하지 않으며 작품성 좋은 도자기를 생산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과 맥을 함께 한다.

이곳 양양군 서면 오색리에 있는 백자 가마터는 지방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백자 가마터도 아니면서 제기를 제작한 장소란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자파편 양양군 서면 오색1리 백암마을의 사기막골에서 발견된 가마 내벽의 황토가 불길에 날리며 그릇의 안쪽을 망쳐 깨버린 백자 파편이다.
▲ 백자파편 양양군 서면 오색1리 백암마을의 사기막골에서 발견된 가마 내벽의 황토가 불길에 날리며 그릇의 안쪽을 망쳐 깨버린 백자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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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방의 가마들이 쇠락의 길로 접어 든 시기에 어떤 연유로 이곳 오색마을에 백자를 굽는 가마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이곳 양양군에 양양향교와 동해신묘 등과 연관이 상당히 클 것으로 보인다. 향교야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에서 각 고을마다 세워졌으니 여기 거듭 거론할 필요는 없겠고, 동해신묘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설명한다.

동해신묘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낙산해변 근처 송림에 있는 동해신묘는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 중대한 제사로 제정되어 동해의 용왕신에게 풍농과 풍어를 빌었다.
▲ 동해신묘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낙산해변 근처 송림에 있는 동해신묘는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 중대한 제사로 제정되어 동해의 용왕신에게 풍농과 풍어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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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의 낙산해변이 가까운 조산리에 있는 동해신묘는 동해의 용왕신에게 나라의 태평성대와 풍농·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던 유서 깊은 유적지다.

신라시대부터 동해의 용왕신에게 제사를 지낸 제단으로 고려 공민왕 19년(1370) 강릉 안인포에 설치되어 있다가 성종21년(1490)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조선 초기부터 중사(中祀:국가적제사로 대·중·소사의 규모 중 중간)로 제정되었다.

동해신묘는 서해의 풍천과 남해의 나주와 함께 바다의 신에게 매년 2월과 8월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곳으로 나라에서는 제사에 사용할 향과 축문을 내려 보냈다.

이 곳 동해신묘는 조선경종2년(1722)과 영조28년(1752)에 양양부사 채팽윤과 이성억에 의해 건물이 다시 지어졌고, 정조24년(1800) 어사 권준과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의 요청으로 재차 중수되었다. 그러나 순종2년(1908)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비석이 잘리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또한 이때 건물이 철폐되었다.

1993년부터 양양군에 의해 동해신묘 복원사업이 추진되었다.

동해신묘중수비기사비 양양군 조산리에 있는 일제에 수모를 당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1800년에 세워졌던 동해신묘중수 기사비.
▲ 동해신묘중수비기사비 양양군 조산리에 있는 일제에 수모를 당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1800년에 세워졌던 동해신묘중수 기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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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중수비기사비 양양군 조산리에 있는 일제에 수모를 당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1800년에 세워졌던 동해신묘중수 기사비의 비문내용을 1993년 양양군이 복원을 한 뒤 안내문을 설치했다.
▲ 동해신묘중수비기사비 양양군 조산리에 있는 일제에 수모를 당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1800년에 세워졌던 동해신묘중수 기사비의 비문내용을 1993년 양양군이 복원을 한 뒤 안내문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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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해신묘 옛터에는 남공철에 의해 1800년에 세워진 동해신묘중수 기사비가 잘린 부분을 붙인 상태로 남아있다.

이곳 양양향교와 동해신묘에서 동해 용왕신께 풍년과 풍농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릴 때 사용된 제기를 오색의 백자가마터에서 제작하였으리란 판단은 정조24년에 어사 권준과 관찰사 남공철의 요청으로 동해신묘가 중수된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 현대의 도자기는 보다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 미적 감각이 탁월한 작품들 또한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다.
▲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 현대의 도자기는 보다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 미적 감각이 탁월한 작품들 또한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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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막골'이란 이름으로만 남아있던 조선 백자의 가마터를 확인하고, 마을 어르신들의 도자기 전시회를 치르며 이 또한 양양군에 좋은 관광 상품이 되리란 판단과 함께 반드시 되살려낼 필요가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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