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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천부천(冊賤父賤)'이라는 말이 있다. 책을 천하게 여기면 아버지를 천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책을 냄비 밑에 깔거나 벤치에서 잠을 잘 때 베개로 삼는 행태를 한탄하며 학창 시절 한문 선생님이 소개한 글귀로 기억한다. 책을 읽는 차원을 넘어 조심스럽게 다루라는 의미일 것이다. 당시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읽으면 그만이지 신주단지 모시듯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재에 살다> 표지
 <서재에 살다>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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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문은 신간, <서재에 살다>를 보면서 어느 정도 풀린다. 조선시대 그러니까 책이 귀하던 시절엔 출판 자체를 국가가 했고 인쇄 여건상 권 수도 제한적이었다. 이러니 책은 당연히 귀할 수밖에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빌린 책을 베껴서 소장하곤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당연 책은 신주단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 박철상의 <서재에 살다>는 독자들을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서재로 초대한다. 당시 지식인들의 서재에는 고유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명명(命名)의 이유나 설명을 읽는 기쁨 또한 만만치 않다.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표격인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는 물론 우리가 북학파 또는 실학파라고 알고 있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서유구 등의 서재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아보자. 한자말이 가득하고 자칫 고루하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첫 서재 '세상에서 가장 큰 서재, 정조의 홍재'를 만나면서 싹 가신다.

조선 후기의 상징, 정조

조선 22번째 왕 정조는 영조로부터 혹독한 세자수업을 받았다. 본인 스스로도 제왕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행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정조에게는 '홍재(弘齋)'라는 호가 있었는데, 주합루라는 서재가 따로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곳에 '홍재'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넓은 '홍'자가 웅변하는 것은 넓고 깊은 마음 씀씀이, 즉 인정이다.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의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무겁겠는가?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으니 얼마나 먼 길이겠는가?"(p.18)

정조가 평소에 새기던 말이라고 한다. 정조는 100책이나 되는 <홍재전서>라는 문집을 펴내기도 했던 조선 최고의 학자였고, 활자 제작과 출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손시절부터 그가 만든 활자가 100만 자나 된다고 한다. 서적의 편찬과 출판을 통해 국론을 통일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강한 의지의 발로였다.

조선의 문봉, 홍대용

<발해고>의 저자 홍대용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내세우는 논리에 배치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발해의 역사를 연구해 우리 역사에 편입해 놓았던 것이다.

가난한 서얼 출신이었던 홍대용은 박제가, 이덕무 등과 정조가 설립한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채용됐다. 왕이 하사하는 책을 내사본(內賜本)이라고 하는데, 이 내사본을 가장 많이 받은 관리이기도 할 만큼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서재 이름은 '사서루(賜書樓)'라고 한다.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사서(賜書)라는 글귀는 정조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나타낸 것이다.

책 읽는 바보 이덕무의 팔분당

책만 읽는 바보(간서치 看書痴)로 불리던 이덕무의 서재는 팔분당(八分當)인데, 그 의미가 심오하다. 집이 작아 병풍으로 나누어 한쪽은 침실로 한쪽은 서재로 사용했는데, 그 나눔(팔분八分)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선함을 10으로 본다면 9나 10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5나 6에 머무는 것은 경지에 미치지 못하니 많이 부족한 것이라고 하여 공부를 통해 10분의 8까지는 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팔분당은 이렇게 탄생한 이름이다.

정약용의 여유당

정약용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입버릇처럼 그를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부르지만, 그는 주자학에 밝은 성리학자였고, 백성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 시인이었다. 임금에게는 충성스런 신하이자 친구였으며, 아내에게는 자상한 남편, 아이들에겐 훌륭한 아버지였다. 글씨에도 뛰어난 문필가였고, 차를 좋아한 다인(茶人)이기도 했다.(p.135)

그의 서재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여'는 큰 코끼리를 가리킨다. 겨울에 얼음판 위를 건너는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유'는 의심이 많은 동물을 의미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는 의미다. 이는 정약용이 젊은 시절 천주학을 공부하는 바람에 유배를 당한 전력에 기인한다. 18년이란 긴 세월을 강진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지식인의 회한을 담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는 관리와 선비들의 당파와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다. 북학파니 실학파니 하는 학자들의 상당수는 고위직에 진출하기 힘든 서자 출신들이 많았고, 정조는 이들을 보듬었다. 명-청 교체기의 동북아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고위관료들이 친명사대주의에 빠져 현실을 외면한 것과는 달리 이들은 청의 문물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조선 현실에 응용했다. 저자가 서재라는 공간에 주목하면서 조선후기 조선 지식인들을 연구한 이유다.

책이란 것이 그저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은 곁에 두고두고 읽고 베끼면서 아끼는 친구나 애인과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서재에 살다>를 통해 배운다. 불행히도 아직도 내겐 그런 책이 없다. 새 책만 읽어대기 때문이다. 우선 서재와 서재 이름부터 지어볼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서재에 살다> 박철상 지음, 문학동네, 2014년 12월 29일 발행



서재에 살다 -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

박철상 지음, 문학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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