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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진은 베개를 끌어당겨 누웠다. 나민혜가 글을 마저 쓰는 동안 그는 선풍기 앞에서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고 있었다.

그들은 폴란드를 거쳐 한여름에 제네바에 도착했다. 마침 제네바에서는 군축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인 전권대사를 비롯한 일행 60명이 같은 호텔에 묵었다. 무슨 일인지 조선 총독 사이토도 와 있었고, 조선의 영친왕 내외도 제네바에 장기 체류하고 있었다.

사이토는 영친왕 내외를 위해 만찬을 열었는데, 그 자리에는 각국 외교 사절과 일본 대표단이 초빙되었다. 박우진과 나민혜 부부도 그 자리에 말석으로 자리를 얻었다.

뜻밖에도 다음 날 영친왕이 박우진 부부를 식사에 초대했다. 아마도 그는 조선인이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영친왕은 나민혜가 화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망국의 왕손은 인자한 목소리로 마치 특혜나 준다는 듯이 말했다.

"과인을 위해 그림 한 점을 그려 줄 수 있겠소?"
나민혜는 황송스러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박우진이 대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영친왕과 의친왕

영친왕, 이은, 그가 어떻게 해서 조선의 왕인지 나민혜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영친왕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당시 일본 육군 중장으로서 고급 귀족인 것만은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후비가 많았다. 그는 평생 7명의 여인과 공식적으로 살았다. 물론 정비는 을미사변 때 죽은 명성황후였다. 고종의 여인 7명 가운데 귀인 장 씨와 귀비 엄 씨가 있었다. 그런데 정비 민비가 낳은 아들 순종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세자를 책봉할 수가 없었다.

정상이라면 귀인 장 씨가 낳은 아들, 즉 고종의 3남이자 순종의 아래 동생인 의친왕 이강이 세자로 책봉됐어야 했다. 하지만 이강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강의 세자 책봉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귀비 엄 씨가 아들을 낳자 그를 이강 대신 세자로 책봉시켰다. 그가 바로 영친왕인데 그는 고종의 5남으로서 3남인 의친왕 이강보다 20세나 연하였다.

영친왕 이은은 철저히 일본인으로 순치되었다. 그는 일본인 처녀 나시모토 마사코와 강제 결혼했는데, 이 처녀는 훗날 한국에서 '이방자 여사'라고 불리게 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원래 일본 황태자비로 간택된 세 명의 일본인 처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최종 신체검사에서 불임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그 불임 예상녀를 한국의 세자에게 결혼시킴으로써 대를 끊을 수도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의 결혼은 급속히 이루어지게 된다.

정략결혼치고 부부 생활에 풍파가 적었던 것은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의 세속적 기질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방자야 원래부터 일본 황태자비를 목표로 길러진 여자였고 영친왕도 세속적인 귀족 생활을 밝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인 중에서 가장 먼저 골프를 친 사람이기도 했다.

한편 의친왕 이강은 15명의 여자와 살면서, 14명의 여자 사이에서 13남 9녀를 생산했다. 그 22명 중 21세기가 된 시점에서 죽은 이가 대다수이고, 미국 거주가 다음으로 많으며 남미에 사는 이도 있다. 9남 이충길과 12남 이석이 서울에서 살았는데, 이석은 훗날 가수가 되어 '비둘기 집'이란 노래로 이름을 냈다.

한편 이방자는 신체적으로 멀쩡한 자기를 불임 가능성이 있다고 황태자 간택에서 탈락시킨 일본에 복수라도 한다는 듯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울에서 죽었고 다른 아들 이구만 남게 되었다.

영친왕이 말년에 실어증과 기억상실증에 걸려 7년 동안 병상에서만 지낸 것과는 달리 (1970년 사망), 이방자는 창경궁 낙선재에서 장애인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다가 1989년 타계했다. 그들의 유일한 아들 이구는 14세까지 일본에서 교육받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 정부는 이구의 귀족 자격을 박탈해 버렸다. 한편 조선 왕실을 인정하지 않은 이승만은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구를 미국 엠아티대학 건축과에 유학을 보내 주게 된다. 졸업 후 그는 미국의 한 건축사무실에서 일하며 건장하게 생긴 미국 여성 줄리아와 결혼한다. 그러나 줄리아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이구는 1963년 박정희의 허락으로 귀국한다. 그는 연세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강의하기도 하면서 국내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그는 조국에서의 안착을 위해 회사를 설립해 운영해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돈을 구하겠다며 줄리아를 두고 일본으로 간다. 돈은 구했는지 못 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초부터 도피성이 있는 도일이었다. 이 와중에 그는 사기혐의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이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한국의 전주이씨 왕족 종친회는 일본에 있는 그를 찾아가 후사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압력을 넣는다. 물론 후사만 생긴다면 보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회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이구는 후사를 얻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이를 못 갖는 미국 여인 줄리아와 정식 이혼한다.

1989년 어머니 이방자 여사도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예언하는 일본 여성점성술사와 동거하다가 1996년 11월 종친회의 권유로 다시 귀국했다. 일본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공부한 그는 어색한 의상과 서툰 동작으로 까다로운 종묘대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처리할 일이 있었던지 아니면 조국의 생활이 안 맞았던지, 이구는 2005년 여름, 다시 도쿄에 가 있었다. 그는 집세를 못 내 살던 집에서 쫒겨 나온 후 한 호텔에 투숙했는데,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이었는지, 그는 옛날 자신이 태어나 살던 집터에 세워진 호텔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이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가 묵은 객실의 화장실에서였다. 종친회에 그의 죽음이 통보된 것은 이틀 후인 7월 18일이었다. 왕족답게 그가 임종한 호텔의 이름은 '프린스'였다.

태극기를 앞세운 마지막 황세손의 운구 행렬 태극기를 앞세운 마지막 황세손의 운구 행렬
 2005년 7월 24일 태극기를 앞세운 마지막 황세손의 운구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 원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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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돈으로 이준열사 참배하겠다고?

나민혜는 마침내 파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림과 불어를 둘 다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파리에 장기 숙소를 마련했다. 그런데 남편이 공무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녀는 따라 나섰다. 헤이그에 도착한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준 열사의 묘에 참배하고 싶어요."

박우진은 갑자기 밸이 틀어졌다. 그녀가 이준 열사 묘를 참배하겠다는 속셈을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는 나민혜를 철없이 허둥대는 순진한 여자로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한국 신문에 쓸 거리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박우진은 한국에서 편히 살면서 애국자연 또는 선각자연 하는 사람들이란 자기 아내와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총독부 돈으로 여행하면서 이준 열사를 참배하겠다고?' 그는 이런 말이 막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나는 영사관에 가 보아야 하니 당신 혼자서 가시오."
박우진이 저녁 무렵에 들어오니 나민혜는, "아무리 물어 보아도 아는 이가 없어 포기했어요"라고 말했다.

박우진은 치밀어 오르는 경멸감을 표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그는 말했다.
"나는 베를린에서 내 전공을 연구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나민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는 파리에 있겠어요. 파리를 포기할 수 없어요."

나민혜는 동양에 호감을 갖고 있는 수왈레라는 사람의 집에 6개월 정도 머무르기로 했다. 1남 2녀를 두고 있는 수왈레 부부는 사회 활동도 왕성하게 하고 있었다. 남편 수왈레 씨는 약소민족지원회 부회장이었고, 수왈레 부인은 여성 참정권을 위한 시민 단체의 회원이었다.

그들은 다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나민혜는 가사와 양육과 시집 모시기에 여념이 없는 조선의 여인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조선의 여자들은 자아를 말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 여인의 삶은 다르다고 여겼다. 그들은 생존과 생활의 수준을 넘어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 들어가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민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그림을 한다는 이유 하나로 가사와 양육과 시집 모시기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인 부부는 가정부나 파출부 없이 1남 2녀를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수왈레 부인은 경제적인 이유로 동양에서 온 여자 하나를 홈스테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으로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민혜는 그림에 몰두하다가도 주인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나 거리 연인들의 사랑 표현 장면을 보면 외롭고 쓸쓸해지고는 했다. 이럴 때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 최린이었다. 최린은 미국에 갔다가 무슨 일인지 앞당겨 파리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최린을 안내한답시고 매일 그를 만났다.

그녀에게 파리의 가을은 아주 로맨틱했다. 최린과 바람을 피우는 그녀에게는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나민혜는 자신의 모험이 남편을 자극해 사랑을 더 두텁게 해 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그것은 진보된 여성이라면 마땅히 생길 감정이라고도 그녀는 여기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떠나는 최린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겠습니다."

최린은 나민혜의 등을 다사롭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과연 진정한 신여성다운 말이오."
하지만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두 사람은 다 알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 작자 김갑수는 최근 전작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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