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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25 19:50 수정 2020.02.06 16:36
박영희, 그는 2020년 1월 26일 2년 일정으로 호주 유학을 떠난다. 마흔다섯 나이에 시작하는 늦깎이 석사 과정이다. 그는 94학번으로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1996년 극단 목화에서 연극 인생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를 '배우'라고만 하기는 비좁다. 그가 극작·연출·연극교육 등으로 무대 인생을 넓혀온 탓이다. 그래서인가, '박영희 연출'이라는 호칭도 제법 익숙하다. '그런데', 지금은 또 '연출가'를 넘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 2018년 2월의 폭풍 때문이다.
 
그해 2월 15일,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을 폭로하고 한 달이 채 안 된 날, 밤새 제 몸을 태웠던 형광등이 지쳤을 때쯤 박영희는 마침내 '게시' 버튼을 눌렀다. 어둑한 방안에는 모니터 화면이 밝게 빛나며 단어와 문장들이 또박또박 펼쳐졌다.
 
"갈비집 상 아래에서 축축한 선생의 손이 내 허벅지로 또 한 손으론 술잔을 부딪히는 신묘함이..."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응원도 있었지만, "오태석이 무너지면 한국 연극이 무너지는데 이렇게 해야 돼?" "복수하려고 미투를 이용한 것 아니야"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박영희 연출 ⓒ 민병래

      
그도 그럴 것이 이윤택과 오태석은 시사성 강한 작품으로 관객과 평단의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오랫동안 한국 연극계의 거장으로 불렸다. 국문학도들에게도 오태석의 연극 세계는 중요한 작품 영역이었다. 
 
연극계 거장 향한 미투, 그후
 
박영희는 1996년 오태석이 대표로 있던 목화에 입단했다. 어렸을 적 드라마 <토지>의 아역배우 안연홍을 보고 배우의 길을 결심하고 예고를 거쳐 연극과를 졸업한 직후였다.

그의 데뷔작은 <여우와 사랑을>로 예매율이 98%에 이를 정도로 인기였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공연 첫 날 하는 '시파티'에서였다. 우연히 그날 오태석 대표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친밀감을 나타내는 줄 알았는데 뿌리쳐도 그의 손길은 집요했다.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없다. 그후 박영희는 '없었던 일'로 스스로를 '각인'시키고 극단 생활을 했다
  
2018년 2월 15일 미투 이후 박영희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목화에 청춘을 오롯이 바친 선후배 동료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들의 희생과 열정이 목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태석의 몰락은 그들 삶이 부정 당하는 듯한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고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가족과 지인에게까지 언론사 전화가 쇄도했고 언급하지 않은 실명까지 짜깁기된 기사, 추측성 기사가 버젓이 돌아다녔다. 이에 대한 정정요청을 하는 것도 숨가빴고 탈진 상태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2018년 2월 22일 극단 고래연습실에서 150명이 넘는 연극인들이 모여 '성폭력반대 연극인모임(아래 성반연)'을 만들 때 박영희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숨어 있는 피해자와 연대하고 지원하는 일이 중요함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박영희의 증언 이후 황이선의 추가 폭로와 오태석이 서울예대에서 행한 몇몇 사례들이 더 밝혀졌다. 오태석은 기자회견을 약속했지만 6시간 전 돌연 취소하고 행방을 감췄다. 이윤택에 대한 형사절차가 진행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사태가 전개되었다.
 
주변에서는 공소시효와는 상관 없이 상징적 고발도 권했지만 박영희는 고민 끝에 마다했다. 오태석 본인이 "한국 사회에 어른이 없다"고 늘 한탄했기에 "연극계의 어른으로서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기다리고자 했다. 그러면서 박영희의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안희정을 폭로한 김지은이 JTBC 뉴스룸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는 그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돼 왔다.
 
그런데 2018년 4월, 극단 목화 홈페이지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루마니아·대만 공연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공지가 떴다. 연극계는 다시 들썩였지만 예술경영지원센터는 "2018년 사업이고 해외 공연기관과 연계되어 취소하면 막대한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며 루마니아 공연을 강행했다.
 
그때 박영희는 어렵사리 대만 공연계의 실력자 란베이츠와 연결이 되었다. 그는 "목화의 대만 공연은 기만적인 행위이며 공연취소를 위한 대만 예술가들의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이에 란베이츠는 개인 성명을 발표했고 대만 매체는 이를 기사로 받았다. 란베이츠의 성명 다음날인 5월 3일 대만국립전통극예술센터는 목화의 공연 취소를 전격 발표했다. 용감하게 던진 이메일 한 통이 대만과 한국의 국제연대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스톡홀롬으로, 또 시카고로
 
그 후 국제연대를 위한 박영희의 노력은 '뜻하지 않게' 계속되었다. 2018년 8월 스웨덴에서 기자와 결혼한 막내여동생의 산후조리를 위해 현지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지에서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도 미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영방송 기자인 제부의 도움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부분에 노미네이트된 배우이며 연출가인 바하르 파스를 스톡홀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수잔나 딜버와 함께 스웨덴 미투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통역도 없었지만 박영희가 호주 무대에서 활동했던 경험 덕에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무대인생 3막을 준비하는 박영희 연출 그는 안전하고 건강한 창작 생태계를 만드는 데 희망을 걸고 있다. ⓒ 민병래

     
"우리는 연극, 공연, 영화, TV 연기자까지 500명이 넘는 여배우들이 한날한시에 공동성명을 내고 단체 미투를 했어요." 바하르 파스는 눈을 반짝이며 얘기를 시작했다. "유명 여배우가 혼자서 폭로했을 때 감당하는 몫이 너무 큼"을 스웨덴에서도 뼈저리게 겪은 후, 영리하고 전략적인 방법을 택했고 지금은 생태계를 바꾸는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두시간 가까이 그녀와 얘기를 나눈 후 박영희는 가슴이 뚫렸다. 체류 내내 잿빛 하늘이었던 스웨덴의 하늘이 순식간에 밝은 파랑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박영희는 카페를 나서자 마자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한국에 가서 '성폭력반대연극인모임' 동료들에게 들려줄 얘기가 한 보따리였고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스웨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박영희가 품었던 질문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혁신운동'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였다. 그때 하나의 빛으로 다가온 것이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CTS)'였다.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그는 2018년 11월 국제전화만으로는 성이 안 차 시카고로 날아가 이를 만든 로라 피셔를 만났다.
 
로라는 박영희에게 "문제는 두더지를 잡는 게 아니야"라며 "시카고 프로파일 극장의 공동 대표인 다렐 콕스는 2010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 '킬러 조'에서 공연 중에 여배우의 목을 조르고 냉장고에 집어 던지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강간하는 연기를 했다. 관객과 평단은 광기 어린 무대라며 환호했지만 몇 달 후 벤슨과 웰린, 두 젊은 여배우의 폭로로 열광했던 모든 순간이 진짜 '폭력'과 '성폭행'이었음이 드러났다"는 놀라운 얘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자신이 "현장 예술가들을 모아 오디션 과정에서부터 연습, 공연 종료 시점까지 모든 상황을 고려한 현장 백서이며 규약집인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를 주도해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박영희는 로라의 사무실에서 2시간여 동안 몸짓을 더 많이 하며 나눈 대화로 출구를 본 듯했다. 로라가 헤어지면서 다시 힘주어 내뱉은 "최종 타깃은 시스템이야"라는 말이 시카고의 밤하늘에 불도장처럼 새겨지는 듯했다.
 
스톡홀름과 시카고에서의 인연을 바탕으로 박영희는 한국으로 스웨덴의 배우조합 의장 수잔나 딜버를 불러 2018년 11월에 '연대의 힘' 포럼을, 미국의 로라 피셔를 2019년 2월에 불러 성반연과 함께 국제 워크숍을 개최했다. 스웨덴과 미국, 한국이 건강한 창작 환경을 위해 끈끈하게 연대하자는 다짐이 오갔다.
   

성수동 카페 백산에서 박영희 연출 그는 무대인생 3막을 얘기하면서 희망차 있었다 ⓒ 민병래

     
이렇게 2018년, 2019년을 통해 박영희의 무대 인생은 변했다. 배우에서 연출로, 다시 건강한 공연생태계를 위한 활동으로 그의 노력과 시야가 넓혀진 것이다. 그래서 호주 유학의 연구주제도 '예술가의 창작자유와 도전정신을 격려하면서 젠더차별 없는 안전한 창작방식'으로 잡았다. 

하루에 1cm씩
 
목화 단원 시절 박영희의 연봉은 1백~2백만 원 수준이었다.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선배들은 공연이 끝나면 가까운 동대문시장 등에서 새벽까지 일을 해 생계를 꾸렸다. 박영희는 집이 대학로에서 먼 김포여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저 아빠에게 "3000원만 주세요" "5000원만 주세요" 그렇게 차비까지 받아가면서 연극 일을 했다. 그렇게 7년을 버텼지만 박영희는 인간답게 살지도 대우받지도 못하는 삶에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연극 일을 포기하고 극단을 나왔다. 그게 2002년이었다.

박영희를 다시 돌려세운 계기는 아빠의 투병이었다. 2005년 위암을 앓던 아빠는 텔레마케터 일로 번 돈을 가져온 박영희에게 "네가 병원비를 줘서 좋지만 가시방석이다. 네가 연극 일을 할 때 행복해 보여 좋았다"고 넋두리하듯 얘기했다.
 
그리고 이틀 후 거짓말처럼 어린이 영어연극 전문극장인 라트어린이극장에서 한국인 배우가 필요하다며 오디션 기회가 왔고 아빠의 바람 덕인지 합격이 되었다. 여기서 박영희는 처음으로 고정월급을 받았다. 4대 보험도 적용받았고 9시에서 5시까지 근무를 했다. 백프로 창작 공연이어서 더욱 좋았다.
 
무엇보다 라트어린이극장에서 시드니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이었던 로저 린드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박영희 안의 여러 재능을 발견하고 끌어올려줬다. 판소리를 공부했던 박영희는 이곳에서 주제 음악에 화음을 얹었고 음을 들으면서 보컬라이징을 했다. "내게 이런 재주가 있었나" 스스로 놀라면서.
 
라트에 있을 때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안 좋아졌다. 예전에는 "연극을 위해 네 사생활을 연습실에 가지고 오지 마"라고들 했다. 그래서 관혼상제는 꺼낼 수도 없었다. 예술이 모든 일에 앞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저 린드는 "인간으로서 네 삶이 예술보다 우선한다"며 아버지를 위한 병간호를 배려해 주었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사람으로 인해 다시 힘을 얻어 박영희는 제2의 연극 인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후 로저의 도움으로 활동 폭을 호주로까지 넓혔고 박영희의 무대 인생은 배우, 극작, 연출, 연극 교육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 덕에 귀국 후 예술감독으로 4개월간 준비해서 김천교도소 소년수들이 직접 출연하는 -교화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창작 뮤지컬 <소년표류기>를 만들었다. 또 2015년 11월 인권 연극제에 초청받아 서울미아리 예술극장에 올렸던 <보이스>도 만들었다. '트랜스맨'이라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다른 많은 작품도 있었지만 <소년표류기>나 <보이스>는 박영희가 특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었다. 이런 작품 세계를 가졌기에 그는 연극생태계를 바꾸는 운동에 기꺼이 나섰는지도 모른다.
 
그는 호주로 출발하기 전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하루 1cm씩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라고 희망을 말했다. 미투를 포함, 그동안 삶 속에서 변화를 결심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래야 주변 동료들과 세상을 더 깊이 생각하고 존중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배우에서 연출로, 또 연극 생태계 혁신가로 변화해왔던 그는 2년 후 어떤 이름, 어떤 언어를 가지고 돌아올까?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의 목적 선언 발췌문
창작환경이 안전하지 못할 때, 예술가와 예술, 두 가지 모두가 위태로워진다. 폭력적이거나 위험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공간은, 대처가 필요할 때, 예방 절차나 의사소통이 없으면 어느 순간 안전하지 못한 영역이 되고 만다. 예술가들은 괴롭힘이나 학대, 안전하지 못한 관행에 대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 힘의 차이가 있는 경우 더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새어 나와 공연을 망치거나 자신의 평판을 망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심한 괴롭힘이나 학대 행위를 견디다 업계를 떠나기도 한다. 위험에 곧바로 노출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안전하지 못한 환경과 괴롭힘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예술가와 관련 기관들이 일을 성실하게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CTS)는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거나, 각자 맡은 일이나 역할에 우위를 두거나, 법적 효력 발휘를 위한 용도가 아니다. 예술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해 야 한다는 인식을 퍼트리고, 이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문서다.
 
CTS는 경험 많은 제작자와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해서 만든 결과물이다. 극장형태, 조직체계, 예산규모, 환경조건은 존재하는 공연단체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CTS는 단체에 따라 적절하게 변형되어 현장에 적용될 수 있다.'
 
* CTS전문은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 CTS워크샵자료집을 내려받기하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박영희의 B컷>
    

성수동 백산 카페에서 박영희 연출 ⓒ 민병래

     

홍대앞 북카페 1984에서 박영희 그는 무대인생 3막에 대한 새로운 설계로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 민병래


<못다 한 이야기>

그가 기고한 두편의 글에서 스웨덴과 미국의 방문기를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4899
http://webzine.e-stc.or.kr/01_guide/diary_view.asp?flag=READ&Idx=1260
 
2. 2016년 김천소년교도소 작업관련기사는 아래를 참조하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772645.html
 
3. 성소수자 '트랜스맨'의 작품 이야기는 아래 기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709955.html
 
<박영희의 프로필>

1994년 계원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1996년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 졸
1994~1996년 적벽가 인간문화재 고 한승호 선생으로부터 적벽가 사사 
1996년 극단 목화레퍼토리 컴퍼니에서 7년간 활동 
2005~2011년 라트어린이 극장에서 배우, 조연출, 보컬코치로 활동  
2011-2019 한국 호주 예술가 국제교류 및 공동창작 작업 "지하 Underground", "물의 기억:Deluge", "The 떡복기 Box" 현재 한호 국제 창작그룹 컴퍼니배드 멤버
2015년 인권연극제 초청 '보이스' 극작, 연출, 배우 
2016년 (사)제로캠프 주최, 김천소년교도소 재소자들과 창작뮤지컬 '소년표류기' 예술감독
2018년 극단 잼박스 '위험한 실험실 B-123' 연출, 공동극작 
2019년 스토리텔링쇼 나이팅게일 공동작,연출,출연
2018, 2019년 스웨덴 수잔나 딜버 초청 연대의 힘 포럼 기획, 로라 피셔 초청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 워크숍 기획
 
<박영희를 만든 시간들>
   

라트 어린이극장에서 공연 후 앞줄 가운데가 박영희다(사진제공: 박영희).

   

김천소년교도소 재소자들과 소년표류기를 만들 때 예술감독으로 창작 뮤지컬을 2015년 만들 때 모습(사진제공: 박영희)

     

시카고 스탠다드를 만든 로라 피셔를 초청한 워크숍에서 박영희는 시카고로 날아가 로라 피셔를 만나고 한국으로 초청했다. (사진제공: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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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