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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9.17 14:34 수정 2019.09.17 14:34
중국을 여행할 때마다 느끼지만 중국인들의 술상은 거대하다. 술상인지, 밥상인지, 연회식탁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로 치면 반찬이 놓일 자리에 요리가 놓이고, 육지와 바다와 하늘에서 나는 식재료들이 모두 동원된다. 풍요로워서 음식을 가득 차려내는 것일까, 여럿이 함께 먹으려고 많이 차려내는 것일까?

원탁의 원판 위에 요리와 술병이 놓여 회전하고, 작은 술잔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원탁이 크니 서로 잔을 부딪칠 수가 없어, 각자 잔을 들어 탁자를 탁탁 두 번 내리치는 것으로 건배를 대신한다. 남겨진 음식으로 접대의 만족도를 확인하는 관행이 있으니, 감히 남은 음식을 물리치고 2차를 향해 갈 수가 없다.

한국인들이 안주를 밝혀 술보다 안주를 더 많이 펼쳐놓고 마신다고는 하지만, 우리에 견주면 중국인들은 안주에 파묻혀 술잔이 안 보일 지경이다. 다만 중국 술상은 빠이주(白酒) 독주가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하여 부단히 음식과 무게를 맞추려 하는 게 인상적이다.
 

동두도 망해루에서 바라본 원저우 앞 바다 풍경. ⓒ 막걸리학교

 
중국 저장성(浙江省) 원저우(溫州)에서 중국인 사업가를 만났다. 원저우는 상해 남쪽에 있는 해안 도시로 스테인리스 스틸 가공, 장난감, 가죽 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원저우 사람들은 중국의 유태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동산 투자를 잘하고 장사속이 밝다고 한다. 내가 만난 원저우 사업가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동을 소재로 한 증류기 제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일행이 공항에 내렸을 때 운전기사로 나왔다. 30분쯤을 달려 공업단지 안의 제조장에 도착해서 명함을 주고받고서야 그가 제조장 대표인 걸 알았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깎아낸 곱슬곱슬한 쇠 잔해물들이 마당 한쪽에 가득 쌓여있었다. 작업자들이 전기날을 들고 스테인리스 스틸 통을 다듬거나 끼우고 있었다.
 
제조 장비 전시장을 들어섰더니, 그곳이 곧 양조장이었다. 500ℓ 당화솥과 여과솥이 있는 맥주 장비가 있고, 한쪽에는 500ℓ 규모의 동증류기가 있었다. 1톤짜리 발효통에서 뽑은 맥주를 시음하고, 100ℓ짜리 동증류기에서 내려 오크통에 한 달 정도 숙성시킨 증류주를 맛보았다. 우리 장비로 만들면 이 정도의 술맛이 나온다는 뜻이었다.

칭따오 맥주 제조장이 있는 칭따오(靑島)의 스테인리스 스틸 맥주 장비 회사를 방문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장비보다는 사람들의 일손이 더 많이 가는 노동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맥주와 증류주 장비는 술이나 술덧을 끓이는 공정이 있기에 전기 시설이 중요하고, 온도 관리 시스템이나 가열 후의 청소 문제가 중요하다.

제조 공정이 복잡할수록 기계의 도움을 더 받을 수 있다. 증류 장비는 주문 제작하는 것도 많아서, 주문자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탄생한다. 중국은 이미 최대 맥주 생산국가의 반열에 올랐고, 증류주인 빠이주의 생산량이 많아 증류 기술도 발달해 있다. 게다가 중국 술 장비 산업은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유럽의 기술력을 접목하여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고유한 증류 장비는 옹기로 된 소줏고리다. 옹기는 얇아질 수가 없으니 커질 수가 없다. 한 사람이 두 팔을 벌려 간신히 안아서 들 수 있는 칠량 옹기의 소줏고리만 하더라도, 높이가 56㎝에 몸통 폭이 43㎝에 지나지 않는다. 입구 지름 42㎝ 가마솥 위에 올려놓고 증류를 해야 하는데, 그 정도면 가마솥 용량은 40ℓ밖에 안 된다.

이 장비로는 자가 소비할 수 있는 양을 만들어내지, 잉여 산물을 만들어 상품으로까지 진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반적인 한국의 증류주 제조장들은 소줏고리를 포기하고, 500리터에서 1톤 용량의 증류기를 사용하고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산업은 국내에서도 활성화되어 있으니 국내 제작 스테인리스 스틸 증류기들이 양조장에 보급되어 있다.
 

동증류기를 구성하는 솥과 냉각관들. ⓒ 막걸리학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저우에 온 것은 동증류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국내에도 동증류기를 만드는 곳이 있다. 경기도 광주의 한 회사는 30ℓ짜리 알람빅 동증류기에서 300ℓ 하이브리드 동증류기까지 만들어서 한 해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국내 동증류기 산업은 동 값이 비싸기도 하고, 수요가 적어서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간 원저우의 동증류기 제조장 안에는 눈에 띄는 좋은 제품이 없었다. 모두 팔려나갔고, 주문 제작하기 때문에 사진으로밖에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상해 박람회에 나간 적이 있지만, 자꾸 자신들 것을 복제하기 때문에 요사이는 박람회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떤 제품이라도 만들어줄 수 있으니 디자인 도면을 제시해 달라고 했다.

첫날 제조장을 둘러보고 우리는 해산물 전문 식당에서 저녁 식사 환대를 받았다. 용두어 조림이 나오고, 사오싱주(紹興酒)로 맛을 낸 국물에 담긴 낙지가 나오고, 흑미 찰밥이 나왔다. 제조장에서 직접 만든 맥주 5ℓ와 위스키 1통을 다 마시고서야 식사가 끝났다. 이튿날 우리의 일정이 있다고 하니, 제조장 대표는 차를 내주겠다고 한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서 그 친절을 받았더니, 어제 증류주를 내려서 우리에게 권했던 청년과 공항에 나왔던 안내인 여성이 나왔다. 우리는 그들의 안내를 받아 원저우 해안의 동두도(洞頭島)를 여행했다. 섬과 섬 사이에 긴 다리를 건너, 섬의 전망대 망해루(望海樓)에 오르니 섬 안에 또 다른 거대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태풍이 와서 일부 구간이 끊겼다는, 섬 벼랑에 설치된 잔도를 따라 웅장한 원저우 앞바다를 둘러보기도 했다.
 

원저우 동두도의 벼랑에 걸린 길. ⓒ 막걸리학교

 
섬을 뒤로 하고 돌아온 저녁에 또 다시 제조장 대표로부터 식사 대접을 받았다. 핸들을 잡은 청년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우리의 거절에도 괜찮다며 "메이요(没有)! 메이요(没有)! 메이콴시(没关系)!"만 연발했다. 식당에서 제조장 대표는 톈진(天津) 특산품 장미 고량주와 친구가 선물한 상표 없는 마오타이주를 내놓았다. 저녁 식사를 하는데 거래의 끈이 더 단단히 동여매지는 것 같았다.

원저우시를 방문한 게 아니라, 그가 사는 거대한 도시를 찾아온 것 같았다. 통역을 맡은 동행인은 좋은 관계가 이뤄졌다고 평했다. 중국인들이 술을 거듭 따르면서, "우리는 친구지 않느냐!(我们不是朋友吗!)"라는 말이 나오면 그 거래는 성공적이라고 했다.

술이 거래를 부추기고, 술 장단에 사람 마음이 흔들린다. 검은 모자와 옷을 입고 거리를 느긋하게 걸어다니는 유태인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그런 걸음걸이로 원저우 사업가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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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