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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5.22 12:07 수정 2019.05.25 15:48
'똑경제'는 똑똑한 경제필진 4명과 함께 매주 수요일 찾아가는 똑똑한 경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지난해부터 지방 제조업 일자리에 대한 연구를 위해 전국을 다니고 있다. 그러던 중 깨달은 것 하나가 '복제'의 매커니즘, 그리고 그에 걸리는 시간에 대한 것이다.

우선 이 이야기를 꺼내려면 필자가 일간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알게 된 사실 하나를 설명해야겠다. 2010년쯤 패션 담당 기자로 일할 때였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인 한 의류회사는 항상 당대 최고 스타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홍보 활동도 열심히 해왔다.

그런데 그 회사 브랜드들은 이상하게도 젊은 층에서는 외면 받는, 속된 말로 '한물 간' 디자인의 제품만 만들었다. 디자이너들의 실력이 없어서 일까?  그 회사 디자이너 면면을 보면 유학파를 비롯해 최고의 인재만 선발하고 입사 경쟁률도 높다고 하니 그럴 리는 없어 보였다.

'복제' 하는 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
 

패션쇼패션 트렌드는 복제해서 따라가려 해도 계속해서 새로워진다. (출처: 셔텨스톡) ⓒ 셔터스톡

 
우연한 기회에 그 회사 홍보 담당자에게 이유를 물어봤더니, "우리 제품의 주요 소비자가 지방 대도시 주민들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울 소비자들의 취향은 글로벌 유명 브랜드들이 파리, 뉴욕에서 선보이는 최신 트렌드와 별 차이가 없고, 어차피 국내 기업으로서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지방 대도시 소비자를 노리는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부러 최신 트렌드와 어느 정도 시차가 있는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그 의류 브랜드들은 서울 주요 백화점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지역 도시들 중심가에는 널찍한 단독 매장을 갖고 있었다. 이 설명을 듣고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TV, 인터넷을 통해서 대한민국 어디에 살든, 아니 세계 어디에 살든 같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세상인데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그 정도로 나느냐고 다시 물었다. 홍보 담당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럼요. 서울의 트렌드가 지방으로 오는 데는 몇 년이 걸립니다."

비록 10년 가까이 된 이야기지만, 지금도 그 브랜드가 같은 전략을 쓰는 것을 보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패션 분야처럼 유행 변화가 빠른 분야에서도 이 정도인데, 건설과 생활 인프라 등을 '복제'하는 데 나타나는 시차는 더 분명할 것이다.

복제된 도시에서 살아야 할 이유?

최근 한 지방 도시에 도착해서 기차역을 나서는데 눈 앞에 신축 공사 중인 아파트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었다. 족히 몇 천 세대는 될 것 같았다. 지역 사정을 아는 이에게 "이 도시에 저 아파트를 채울 만큼의 신규 입주 인구가 있나요?" 하고 물었다.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에 따라서 얼마 전 한 공기업 본사가 이전해 왔다고 한다.

그 직원 수는 1000여 명 정도. 그들이 전부 이사를 온다 해도 짓고 있는 저 아파트들을 채울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다 공기업 직원들이 모두 가족과 함께 이사 오고, 수도권에서의 라이프 스타일까지 그대로 옮겨 오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보다는 매주 KTX를 타고 수도권의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주말을 보내고 올 가능성이 더 높다. 자녀 교육, 배우자의 직장, 수도권의 집을 팔기 어려운 사정 등등, 핑계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복잡한 수도권을 떠나서 지역에서 사는 쪽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매일 출퇴근에 많게는 서너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 만족스럽지 않은 집에 사는 데에도 수입의 상당 부분이 들어간다는 것, 자녀들이 마음 놓고 뛰어 놀 공간도 없다는 것 등등, 다른 삶을 꿈꿔 봄직한 이유도 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방 도시에서의 주거 환경이라는 것이 결국은 수도권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고, 그나마도 '복제'에 걸리는 물리적 시간 때문에 아무리 새 것이어도 어딘지 뒤쳐져 보이는 형태라면 어떨까? 굳이 지방도시로 이사하느니 이사할 수 없는 이유, 앞서 나열했던 그 핑계들을 찾게 되지 않을까?

경쟁력 없는 닮은꼴 도시들
 

공공기관이 이전된 지방의 한 혁신도시 모습. ⓒ 경상북도

 
지역마다 도심과 주변 지역의 구성은 묘하게 비슷하다. 어느 시기에 개발 붐이 일었는지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대체로 구도심에서는 1980~1990년대 서울에 많았던 콘크리트 빌딩과 '맨숀' 스타일 아파트, 연립주택을 볼 수 있다.

신도심에는 2000년대 이후 조성된 수도권 신도시 느낌의 아파트와 대형마트들이 있다. 그 주변으로는 유동인구에 비해 과도하게 커 보이는 주민 편의 시설, 복지센터 등이 신축되어 고요하게 서 있다. 지역 고유의 역사와 이야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닮은꼴들이다.

이렇게 복제 도시들이 열심히 만들어지는 가운데, '원본'인 서울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복제 도시들도 나름대로 변신을 거듭해 보지만 원본과 같아질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계속해서 달라지는 것 자체가 원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파리, 뉴욕, 밀라노의 패션쇼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트렌드가 발표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조어를 아무리 빨리 익혀서 써먹어 봐야 청소년들에게 "구리다"는 말을 듣는 것도 같은 이치다. 따라서, '복제'의 전략을 취했다면 애초부터 '원본'에 대한 경쟁력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지역마다 공공기관을 이전시키면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는 주장이 옳았는지부터 다시 돌아봐야 한다. 사실상 수도권의 좋은 일자리,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방에 복제하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일자리'에서 일할 만큼 경쟁력 있는 사람들은 복제된 도시에서의 삶을 여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원본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도권 집값이 아무리 비싸고, 집과 직장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수요가 살아있기 때문에 수도권 도시들은 지방 도시들 못지않게 새 아파트를 지어대고, KTX, SRT 등 수도권 집으로 직원들을 실어나르는 교통편은 점점 더 발전한다. 어디를 봐도 지방 도시들이 살아날 수 없는 구조다.

고유한 '원본'의 삶 추구하는 사람들
 

귀농 귀촌 인프라 구축을 위한 기업 ‘팜프라’(맨 왼쪽 유지황 대표)가 청년 세대를 위한 작업복 '폿'을 크라우드펀딩으로 선보였을 당시 사진. ⓒ 팜프라

 
그런 가운데 작지만 귀한 희망의 실마리도 보인다. 거대한 복제 구조에서 벗어나서 전혀 다른 전략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귀농 귀촌 청년들을 위해서 자연에 동화되는 이동식 주택, 새로운 스타일의 작업복을 만들고 있는 '팜프라'(대표 유지황) 구성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농촌에서의 일과 삶이 도시에서보다 더 보람될 뿐아니라 더 멋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현실로 만들어 보이고 있다. 이들에게 귀농 귀촌을 상의하는 또래 청년들이 다 응대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고 있는 모양이다. 그 청년들에게 팜프라는 하나의 '원본'으로 보일 것이다.

이밖에도 고유한 '원본'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은 전국 각지에 있다. 물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숱한 어려움도 겪을 것이다. 중도에 포기하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일과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 지역만의 문화가 되고 그곳은 비로소 '원본 도시'가 된다. 소리 소문 없이 자리잡은 서퍼들로 인해서 서핑 문화의 중심지가 돼 버린 양양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 필승 선거전략일 뿐인가?

이런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이례적이고 작은 규모일 뿐이어서 전국적인 일자리와 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자리와 인구 문제의 대안이 되지 못 하기는 '복제 도시' 전략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새 아파트와 사무용 빌딩들이 텅텅 빈 채로 늘어선 '혁신도시', '기업도시'들이 그대로인데도 정책 입안자들은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지 궁금하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느니 작더라도 새로운 시도들이 하나라도 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물론 이런 시도들은 그 고유성과 자발성, 각기 다른 개성에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억지로 유도하거나 확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생활 안정성과 필수적 생활 인프라를 저변에 깔아주는 방향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여당에서 내년 총선 공약으로 수도권 122개 공공기관 지방 이전 방안 채택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지역 언론들마다 해당 지역으로 이를 끌어와야 한다는 보도를 쏟아냈고 한 매체에서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복제 도시'의 실험이 아직도 더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실패한 적 없는 선거 전략이 이번에도 절실한 것뿐일까, 질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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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기자,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홍보팀장으로 일했고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에서 사회적경제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희망제작소 연구원으로 ‘좋은 일, 공정한 노동’ 기획 연구, 보드게임 ‘좋은 일을 찾아라!’ 개발을 담당했다. 현재 LAB2050 연구실장으로 일하며 고용위기 시그널 분석, 지역 일자리 구조 전환 연구 등을 진행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