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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4.22 08:23 수정 2019.04.23 17:58

코리아페어반트 사무실의 한정화씨 ⓒ 권은비


(1편에서 이어집니다.)

1978년 만 16살에 파독간호사 어머니를 따라 독일에 온 한정화는 '어떤 계기'를 만나기 전까지 단 한번도 고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강하게 잡아끈 건 '죄책감'이었다. 노동운동에 투신한 중학교 동창이 5.18 카세트 테이프를 동료들에게 들려줬다는 죄로 수감돼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나는 잘만 지내고 있구나.'

이후 그는 삶의 방향을 확실히 바꾼 사건과 만난다. 베를린 한인단체의 의뢰로 한국의 민낯을 알리는 기사 한편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간첩이 되었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정말로 울면서 번역"했다. 비슷한 시기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의 기사를 보고는 한국에 꼭 방문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젠더 문제로 활동 반경을 넓힌 그에게 위안부 문제는 특히 중요했다. 2002년 미국 브라운대 강연을 시작으로 국제 증언에 나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독일에 왔을 땐 통역을 담당했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전해들은 독일 청중들은 울고 웃고 깊이 탄식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 순간을 그는 "큰 영광"으로 기억한다. 

"위안부 피해자 만난 독일인들 '고맙다'고 해"
 

지난 2013년 베를린에서 열린 이옥선 할머니의 위안부문제 강연. ⓒ Tsukasa Yajima

 
- 독일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언제부터 다루게 되었나?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이미 내가 활동하기 전부터 베를린의 재독여성모임과 일본재독여성모임에서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그 역사가 깊다. 나는 2008년에 길원옥 할머니를 독일에서 처음 만났다. 길원옥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보다 비교적 늦게 활동을 시작한 분이었다. 당시 길원옥 할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그러다 시간이 흐를수록 길원옥 할머니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중에는 80살이 넘은 여성도 웬만한 정치인이나 교수들보다 멋지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길원옥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는 독일에서 30개가 넘는 도시를 다니면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셨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은 한 독일 학생은 자신이 집에서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할머니들 마음에는 증오가 없는 것 같다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독일에서 할머니들을 본 많은 사람들이 '몰랐던 역사를 알게 해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독일에 순회 강연을 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든 에너지를 직접 보는 게 나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할머니들의 '아우라'는 일반사람들은 상상도 못한다. 독일에서 우리를 초청했던 여러 시민 단체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집에 우리를 묵게 해주었다. 그렇게 할머니들 덕분에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독일 공영방송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룰 때마다 토론자로 참여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독일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입장과 독일에서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입장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독일의 한인단체였던 민협에서 한국 신문들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한국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처절하게 사람들이 운동한 내용들을 밤새 울면서 번역한 기억이 있다.

나는 16살에 한국을 떠났지만 내 친구들은 한국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또한 나는 한국에 있었다면 이른바 386세대였기 때문에 한국사회에 대한 부채가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부당한 인권에 대해 독일사회에 알리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독일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언어를 '나치'의 언어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한국 특유의 민족적 정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거나 통역할 때 여러 고민들이 있었다.

독일 TV에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관련해서였다. 그 이후로는 주로 북한 이슈가 많았다. 독일에서는 북한을 보는 시선이 너무 일방적인 것이 사실이다. 북한에 대한 선입견이 많다. 지난 남북정상회담 때 토론자로 참여하면서 이를 느끼고, 서구사회에서 북한을 보는 고정관념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구체적인 한반도의 정세를 놓치고 북한 문제를 보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더욱 내가 아는 것들을 열심히 이야기했던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독일에 방문했을 때는 통역을 맡았었다. 그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일일이 교민 어르신들을 돌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으로 바뀐 뒤에 나를 통역사로 쓰지 말라는 한국 대사관의 전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또 어떤 공관의 사람은 나에게 북한의 인권침해 문제를 주로 다뤄준다면 내가 일하는 코리아페어반트가 주류가 될 수 있을 거라며 제안을 하기도 했다."

"여성, 북한, 이주민... 서구사회의 고정관념 바꾸고 싶어"
 

독일 공영방송 phoenix runde에 토론자로 나온 한정화씨 phoenix runde화면 캡처사진 ⓒ phoenix runde

 
- 독일과 한국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면서 '국가' 또는 '국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 같다.
"국적은 내가 선택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국가를 생각했을 때 내가 자랑스러운 것은 오로지 한국의 시민운동밖에 없다. 내가 활동을 하면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나 이총각 동일방직노조 전 지부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나를 독일 사람으로 보고, 독일에서는 나를 한국 사람으로 단순히 규정짓는 것, 나를 나의 배경으로 판단하는 것은 싫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주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이주민을 그 사람 자체로만 판단하고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다."

- 매우 진부한 질문이지만,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
"어릴 때는 화가나 글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막연히 아버지가 늘 글을 쓰시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지금은 글쎄… 독일에 위안부 문제를 더욱 알리고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

독일과 일본과의 관계가 굉장히 돈독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협조를 구하는 활동에 어려움이 있다. 어느 독일 국회의원은 독일도 전범국가이기 때문에 독일 자체의 전범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일본의 전범 문제를 손가락질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서 진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독일에서 이주여성으로 살면서 여성, 유색인종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많이 봐왔다. 특히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서구 사회의 고정관념들을 깨고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한정화씨와 그의 아이들. ⓒ 한정화 제공

 
-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아...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 하하. 너무 추상적인가? 어쩔 때는 우리 단체(코리아페어반트)가 너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나,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위안부, 노동, 인권, 여성문제, 성소수자, 인종, 한반도, 장애인 차별 문제 등을 다양하게 다루고 포용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해봤다.

내가 일하는 '코리아페어반트'는 말하자면 '중세기 컨셉'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기의 도시 형성을 보면 정말 여러 가지가 있다. 마을에 농장도 있고, 푸줏간도 있고, 주거지도 있고, 식당도 있다. 그렇게 도시에 여러 영역이 함께 할 때 창의적인 힘이 나온다고 한다. 현대 도시처럼 농촌은 농촌, 공장지대에는 공장, 쇼핑몰은 쇼핑지역에만 있는 경우와는 다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부산에 있는 시민단체 '이주민과 함께'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정말 없는 것이 없다. 한쪽에는 이주민 치과 진료를 위한 치과장비가 있고, 한쪽에는 식당이 있고, 공지사항도 여러 국가의 언어로 배포된다. 그곳에는 정말 이주민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다 있다. 우리는 각자 모자란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내가 모든 문제에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다.

한편으로 나는 아이를 낳은 후에 대충 사는 것을 배웠던 것 같다. (웃음)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지 않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온 것 같다."

베를린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 시위를 할 때에도,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을 위한 해외 연대 활동과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베를린 촛불 시위 등 한국문제를 독일사회에 알리는 일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코리아페어반트 창고에는 아직도 여러 시위 도구들과 플래카드가 가득하다. 현재까지도 그는 베를린에서 가장 바쁜 활동가이다.

한국의 분단과 유신독재를 경험하고,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경험한 그의 정체성은 어디에도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동시에 독일과 한국 사회 양쪽을 정주하고 있다. 한국의 뼈아픈 역사는 자주 그의 입을 통해 독일어로 다른 세계에 전해진다. 즉,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언어가 아닌, 독일과 한국 사이의 서로 다른 세계를 가로지르며, 두 세계의 거리를 좁히는 작업을 그는 하고 있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여성'으로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공감하고 그 고통의 언어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려는 그의 노력이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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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독일해외통신원. 한국에서 공공미술가로 활동하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고 있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