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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20 15:46 수정 2019.05.29 16:18
인도의 바하르주 게흘로르 마을에 사는 가난한 노동자 다쉬라트 만지히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파군니아와 가정을 일구었다. 그런데 1959년 어느 날 아내가 점심 식사를 이고 오던 중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즉시 병원에 가야 했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도 수십km의 돌산을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결국 아내는 치료 시기를 놓쳐 죽고 만다. 이후 만지히는 1960년부터 망치와 정 하나로 돌산을 깎아 길을 내기 시작했고, 무려 22년 동안 이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982년, 높이 110m 폭 10여m로 돌산을 넘는 길을 만들어 냈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옛 이야기가 전설이 아님을 보여준 실화다. 이 놀라운 얘기는 2015년에 영화 <마운틴맨>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태연, 그는 지금 '사회변혁노동자당'(약칭 '변혁당')의 대표를 맡고 있다.
 
국민에게는 낯설고 생소한 당이다. 그렇지만 오랜 준비과정과 연혁을 갖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자의 힘', '변혁적 현장실천을 위한 전국 활동가모임' 등을 결성한 것이 그 싹이 되었다.
 
그리고 2010년 2월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 준비 모임'을 거쳐 2011년에는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로 나아갔다. 2013년 11월에는 다시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원회'로, 그리고 마침내 2016년 1월 31일 창당대회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변혁당은 많지는 않아도, 당비를 내는 당원의 단단한 힘으로 굴러가고 있다. 월 3만원이 기본이고 좀더 책임 있는 당직자와 대표급은 더 많은 당비를 내고 있다.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서울 영등포의 사무실을 운영하고 10여 명 안팎 되는 상근자의 활동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당은 '변혁'을 주저 없이 내걸고 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을 '사회주의'로 개조해야 한다"는 기치를 오롯이 내걸고 있는 셈이다. 김태연은 2016년 창당대회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2018년 당 대표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변혁노동자당’을 오롯이 새긴 현판 앞에서 ⓒ 민병래


 
당 대표가 되기까지, 그리고 대표로서 활동한 그의 경력은 자못 화려(?)하다
 
몇 가지 굵직한 것만 살펴보자.
 
2005년 '민주노총' 사무차장, 정책기획실장
2009년 '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상황실장
2012년 '노동자대통령 김소연 선거대책본부' 조직위원장
2012년 '쌍용차 희생자추모 및 해고자복직 범국민대책위원회' 상황실장
2014년 '세월호 범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
2016년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재벌구속특위위원장

 
얼마 전에는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었다.

이처럼 이명박·박근혜 정권 10여 년 동안은 물론 그 이후에도 우리 사회의 중심 이슈가 되는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것도 늘 집행위원장이나 대표라는 무거운 책임을 맡으면서...
 
이렇게 이슈를 따라 만들어지는 임시 연대기구의 '상황실장'이나 '대표' 노릇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싸움이 과정 과정마다 고비가 있고 의견, 노선의 차이가 많아서 이를 조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고, (당의 세력도 크지 않은) 그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냈을까? 그의 대답은 소박하다. "'행동하고 헌신하는 것'만이 믿음을 얻고 자리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는 그런 자세로 '변혁당' 정당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연대기구들의 '상황실장'이나 '공동대표'를 맡아왔다.
 
돌아보면 김태연이 운동의 길에 접어든 것은 그의 나이 스물, 1980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동문들은 "그가 하루 종일 말 몇 마디 정도하고, 가끔 미소짓는 게 전부였다"고 기억한다. 학생운동에 발을 디뎠으나 묵묵히 활동하며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4학년에 이르러 시위를 주동하고 구속되며 '직업적 운동가'의 중요한 한발을 내디뎠다. 당시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인 84년 5월경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출소하고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안산의 반월공단이었다. 이후 수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1988년 '경기남부지역노동조합연합'의 사무차장이 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여기서 그는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아내를 만난다. 말이 짧은 그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고 '승낙'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1990년에는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그런데 식을 일주일 앞두고 '경수지역노동자연합' 사건으로 연행되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양가집은 한바탕 난리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1년여를 복역하고 출소해서야 미뤄뒀던 혼인식을 치를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그의 구속 이력은 계속된다. 2009년 3월경 용산참사 투쟁 과정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다가 이때 다시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 외 수배와 연행 기록까지 치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어쨌거나 학생운동에 투신한 이래 관재수를 달고 산 셈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함께 운동을 하는 아내는 그렇다치더라도, 부모님에게는 큰 '대못'이 되었다. 그의 가족은 경남 하동에서 살다가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왔다. 70년대에 상경한 시골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의 부모님들 또한 몸 고생이 많으셨다.
 
그렇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기대를 걸었던 큰아들이 학생운동 한다, 노동운동 한다며 늘 거리를 떠돌다 거듭 구속을 당한" 일이었다. 지켜보시던 아버님은 결국 울화병에 쓰러지시고 근 20년 가까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김태연에게 마음 깊이 남아 있는 상처이며 짐이다.
 
이렇게 아픔과 시련 속에서도 한 길을 걷던 그도 잠시 운동 일선에서 비껴나 있던 적이 있었다. 1993년경,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조직 내부에서 갈등이 너무 깊어 운동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몸과 마음도 추스리고 생계도 돌볼 겸 용산에서 컴퓨터 매장을 운영하던 1년여가 바로 그 때였다.
 
그렇지만 전노협에서 "같이 활동하자"는 제안을 받고 그는 다시 운동 일선에 복귀한다. 김태연은 "계속 장사를 했다면, 돈 꽤나 벌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그때를 기억한다.
 
사실 돈과 관련해서 본다면 대부분 운동가들이 그러하듯 김태연도 늘 곤궁했다. 생존의 문턱에서 언제나 허덕였다. 전노협 이전 노조운동 초창기에는 연합조직의 재정이 부족해 상근 사무실에서도 점심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가 90년대 초반 '경기남부지역노동조합연합' 사무차장을 맡았을 때 상황이 그러했다. 이후 민주노총에 상근할 때, 제법 생계비 수준의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을 나와 당 활동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변했다.
 
변혁당 이전에 활동한 '노동전선'에서는 상근자로서 월 60만~80만원을 받았다. 현재 당대표로 받는 상근비도 월 백만 원 수준이다. 임금 인상과 노동기본권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는 늘 최저임금 밑에서 살아온 셈이다. 놀랍게도 이런 수준의 조건에서도 그의 두 아이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사회변혁노동자당’ 후원의 밤 행사에서 지지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미소짓는 김태연 ⓒ 민병래



이렇게 그가 대학부터 당대표를 거쳐 19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내온 세월이 무려 40년이다. 이 세월 동안 그가 길에서 보낸 시간, 걸었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아쉽게도 40년 세월이 기록으로 남겨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8년과 19년, 한 해 남짓 되는 시기 동안만이라도 그의 발걸음을 찾아보면 어느 정도 헤아려질 수는 있다.
 
2018년 2월 23일 서초동법원 앞에서 '사법개혁을 위한 시민촛불문화제'를 열었다.
3월 22일 국회 앞에서 '택시노동자 월급제 시행을 위한 희망버스 조직활동'을 펼쳤다.
5월 18일 삼성사옥 앞에서 재벌해체를 촉구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7월 27일 마로니에에서 '영상활동가 박종필 추모영상제'에 참석했다.
9월 14일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해고노동자들의 공장복귀 감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9월 19일 인천공항에서 '항공재벌 총수일가 경영권 박탈' 시위를 조직했다.
11월 7일 양재동 현대자동차 앞에서 현대차재벌 노조파괴 규탄기자회견을 열었다.
12월 23일 마포구청 앞에서 '박준경열사의 추모제'에서 발언했다.
12월 26일 의정부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박정상을 면회했다.
2019년 1월 31일 김용균 영정을 앞세우고 조계사에서 청와대로 오체투지에 앞장섰다.

 
이것이 지난 1년간 추려내고 발췌한 그의 움직임 일부이다. 40년 세월에 견줘본다면 그저 한 획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얼마 전 "김용균씨 죽음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하면서, 그의 표현을 빌면 '꼴랑' 보름 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 단식을 끝내고 나서는 녹색병원에서 '꼴랑' 수액 하나 맞은 게 전부였다.
 

청년 김용균 장례식장에서 그는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 민병래


  
만지히는 아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망치와 정 하나만으로 22년 동안 돌산을 깎아 길을 냈다. 그 길을 따라 마을 사람들은 학교·병원·시장에 편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김태연은 만지히보다 두 배 가까운 40여 년 동안 '사회주의라는 신념', 그 신념을 망치와 정으로 삼고 돌산을 깎아 '변혁당' 창당의 길을 내는 데 노력했다.

변혁당을 둘러싼 논란은 있다.
 
"아직도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냐"는 시선에서부터
"4차산업 혁명시대에 걸맞은 대안이냐?"는 의문 부호에 이르기까지...
 
그의 길, 변혁당의 길이 옳은지 적절한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는 오늘도 걷고 있다. 예순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그리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긴다.
아픔이 있고 위로가 필요하고 손을 함께 맞잡아야 하는 곳이 있다면
신발 끈 동여매고... 주저없이.... 
 
김태연의 프로필
1960 하동 출생
1980 성균관대 행정학과 80학번 입학
1983 11월 학내 민주화 시위 주도. 3년 실형 받고 복역
1984 형집행정지로 출소
1986 안산 반월공단에서 노동운동에 투신
1988 경기남부지역 노동조합연합에서 사무차장 등 역임
2001 전노협에서 활동
2005 '민주노총' 사무차장, 정책기획실장
2009 '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상황실장
2012 '노동자대통령 김소연 선거대책본부' 조직위원장
2012 '쌍용차 희생자추모 및 해고자복직 범국민대책위원회' 상황실장
2014 '세월호 범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
2016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재벌구속특위위원장
2019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

 
김태연 대표가 보내온 거리의 시간들
 

하이디스 문제 해결을 위한 청와대앞 일인시위(김태연 제공) ⓒ 김태연


   

쌍용차 연대에 감사를 표시하며 덕수궁앞에서(김태연 제공) ⓒ 김태연


     

항공재벌의 엄단을 요구하며 인천공항에서(김태연 제공) ⓒ 김태연


  

김용균 대책을 촉구하며 광화문 단식농성장에서(김태연 제공) ⓒ 김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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